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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의 존재 가치: 논문 쓰는 법을 알려주지 않는다?

knownlearn 2024. 4. 20. 00:53

필자는 대학원에 들어가기 전에 그곳에서 배울 수 있는 것에 대해 설레곤 했었다. 마치 외교관 양성기관처럼, 마치 군사학교처럼 특정 직업이 노련하게 수행해야 하는 필수적인 스킬을 당연히 가르칠 것이라 추호도 의심하지 않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대학원은 나의 생각과는 달라도 다른 곳이었다. 그것이 한국이라서는 아닌 것으로 보이는데, 오늘 포스팅에서는 대학원에서 논문작성과 관련한 전문적인 교육을 제공하는지에 대한 짧은 생각과 경험을 나누려고 한다.  

 

 

대학원의 존재 가치: 논문 쓰는 법을 알려주지 않는다?
[이미지 출처: pixabay]

 

 

 

 

1. "답답하다"

 

석사과정 중이든, 석사학위를 취득한 상태인 졸업한 후이든 나의 하루하루가 미약하거나 심각한 수준의 답답함과 막막함을 마주하고 있다. 매일 회사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아 느끼는 감정은 막막함 보다는 '답답함'이다. 업무를 할 때에는 나의 생활을 영위하게 해주는 경제적인 대가가 주어지고 있음을 잘 인지하고 있으므로 열과 성을 다해 할 수 있는 한의 노력을 다한다. 그렇기 때문에 업무에 몰두하는 시간에는 그 어떤 감정도 잘 느끼지 못하지만, 업무가 없는 때라면 '자투리 시간을 이용하여 개인공부를 진행해야 한다'는 압박과 맞물려 다양한 감정을 알아챌 수 있게 된다. 알아채는 감정들 중 가장 큰 파이를 차지하는 것이 바로 '답답함'이다.

 

막막하다기보다는 답답한 감정이다. 내가 느끼는 '막막하다'는 것은 문제해결의 가닥조차 보이지 않아 절망스러워 모든 의욕을 상실하게 되는 마음이라면, 답답하다는 것은 문제해결의 가닥은 보이는 것 같은데 그 또한 속시원히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서 사방이 안개로 뒤덮인 상태를 어찌할 수 없는 마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막막함보다는 답답한 상태가 조금 더 나은 상황이지만, 답답함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달가울 리가 없다.

 

답답함은 내가 하루 중 가장 많이 느끼는 감정이다. 왜 그럴까? 나는 왜 답답해야만 하는 것인가. 그 이유로는 앞서 언급했듯이, 내가 몰두하고 있지 않아서이다. 하루 중 무언가에 몰입하고 있는 시간을 더 확보하면 좋으련만, 업무를 제외하고는 더 이상 무언가에 머리를 쓰는 행위를 자의적으로 할 수 없다. 박사과정에 지원한 후, 결과와 무관하게 공부는 지속해 나가야 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전공서적이 아닌 책 한 권을 읽을 의지조차 없다.

 

의지가 없다는 건 흥미가 없다는 말과 동일시되는 것일까? 흥미가 없는지를 생각해 보면 막상 그렇지는 않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하고 싶은 공부를 대학에서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정말로 재미있고 설레었으니까. 다만, 대학에 입학하던 그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공부하고 싶은 분야는 정했는데 그 분야 속에서 무엇을 세부적으로 연구하고 알아가고 싶은지에 대해 결정하지 못한 상황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내 감정은 답답함의 늪 속으로 가라앉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연구하고 싶은 세부전공 분야를 단칼에 정할 수는 없기에 이 답답한 감정은 꽤 오래 지속되지 않을까 싶다.

 

 

 

 

 

2. 답답함의 원인을 찾아

 

석사과정 기간 동안, 제대로 수업을 따라갈 수 없었던 적이 더 많았다. 영어로 진행되는 수업은 거의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고, 한국어로 진행되는 수업이라고 할지라도 소위 말하는 '리딩'의 분량이 너무 많거나 당일 수업에 활용되는 리딩 내용이 어려워서 충분히 소화하지 못했던 탓이다. 학부 때의 전공과 석사 때의 전공이 일치하지 않았으니 학문적 기초가 없는 상황에서 고전을 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하나하나의 수업은 교수님들의 눈에 나지 않기 위해 잘하거나-평균을 맴도는 수준으로 준비했었다.

 

거기에서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생활을 거치며 내가 배운 교훈은 타인과의 경쟁은 나에게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고, 대학원에서의 잘난 동기들은 교수님에 눈에 들기 위해 자신의 온갖 지식을 내 뽐내기에 바빴으니 한사코 그들과 같은 목표를 가지기 싫었다. 학부 때의 부족함을 채우러 지식의 상아탑이라는 대학에 다시 들어와 다른 마음가짐으로 학문에 접근하고 싶었는데 막상 대학원의 현실은 잘해서 교수님의 눈에 들고 높은 성적을 받아서 박사든, 취업이든 다음 스텝을 대비하려는 자들이 모인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학문을 성실하게 대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고, 높은 성적을 받으려면 당연히 공부를 해야 하니 상당 수준의 공부를 했었을 터이다. 즐기며 공부한 자들도 분명 있었다. 반면 공부가 적성에 맞지 않았거나 공부할 상황에 놓여 있지 못해서 부진한 학생들도 있었으니, 이들과 그들의 격차도 존재했다. 그 격차에서 발생하는 경외감, 부러움, 열등감의 감정들은 나로 하여금 공부를 즐길 수 없게 했다. 나는 학부와 상이한 전공을 다루며 모르는 것에 대한 좌절에 익숙해져 갔다. 아마 이 시기가 내가 지금 느끼는 답답함의 시발점이 아니었을까 추측한다.

 

 

 

 

3. 대학원이 제공하는 것?

 

그러는 와중에 나는 학자가 되기 위해 온 대학원이라는 곳에서, 그 누구 하나 제대로 된 논문작성에 관한 교육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충격을 금치 못했었다. 석사과정 중 내가 의무적으로 받아야 했던 교육은 첫 학기 때, 논문 프로포절 작성을 위한 1시간짜리 세미나 1회뿐이었다. 대학원인데 논문에 대한 강조점이 너무나도 적었던 학교였다. 지도교수님을 포함한 교수님들은 바쁘셨고, 선배들은 과반 이상의 월등한 비율로 대개 취업의 길로 빠졌기 때문에 논문과는 정말 거리가 멀었다. 도무지 어디에서도 체계적인 논문작성법을 배울 수 없었다. (개중 학생들에게 관심이 많은 감사한 교수님들은 중간/기말과제로 제출하는 소논문에 정성 어린 코멘트를 달아주시기도 했는데, 이러한 소수의 몇몇 교수님들 덕분에 조금이나마 어떻게 논문을 작성하고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었다.)

 

나는 학부와 석사과정을 졸업한 학교가 다른데, 논문 작성에 대한 교육이라면 되려 학부생 때 학교에서 자주 배웠던 기억이 난다. 학부과정을 마친 학교보다 석사학위를 취득한 학교의 랭킹이 국내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월등히 더 높은데, 정말이지 본질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상대적으로 미흡한 수준이었다. 수업과제로 소논문을 자주 쓰는 곳이 바로 대학원이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소논문을 두고 수업에 대한 성적을 받는 것으로 끝나버린다. (과제로 제출한 소논문에 대해 피드백을 주시는 교수님이 계시다면 그 분은 학생들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논문작성을 예민하게 바라보시는 교육자이시지 않을까 한다.)

 

그렇기 때문에 대학원에 간다고 해서 논문을 잘 쓰게 될 수는 없다. 그 이유로는 다음과 같다.

 

① 대학원은 학문을 배우는 것이 아닌, 학부시절 배운 학문을 바탕으로 지적논의의 범주를 넓혀가는 곳이기 때문에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뼈저리게 노력해야 하며 그 과정에서 지적 토대가 불분명한 학생으로서의 나 자신이 연구 방향성을 설정하리란 결코 쉽지많은 않다.

② '논문을 잘 쓴다'는 수준에 이를 정도로 충분한 논문작성 연습과 피드백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뿐이랴, 학교에서 제공되는 수업의 질 또한 그리 훌륭하지 않았다. 앞서 언급했듯 교수님들은 바쁘셨고, 대학원 수업은 발제 위주로 진행되기 때문에 학생들의 발표가 수업시간의 대다수를 차지했다. 그 속에서 주어진 짧은 시간 동안 발제문을 두고 토론하고 교수님과의 질의응답이 이루어진다. 얼마나 깊이 있는 소통이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을 것 같은가.

 

결국 대학원에서의 공부는 8할 이상이 셀프 스터디, 남은 2할이 동기와 교수님과의 의견교환으로 얻는 사고확장이 대략적인 비율이라고 말할 수 있다.

 

스스로 궁금한 점을 찾아 답할 수 있다면, 대학원에서 학위취득의 가치 외에는 다른 것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자기주도학습의 필요성

 

내가 할 수 있었던 노력은 Youtube나 블로그 등에 논문작성의 팁을 공유해 주시는 분들의 정보를 습득하거나 관련된 단행본 등을 읽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논문이라는 것은, 논문의 목적에 따라 그 가치를 인정해 주는 기관이 제공하는 다양하고 방대한 기준과 논문평가자의 성향을 알아야만 끝마무리를 할 수 있었으므로, 나 스스로 접한 정보들은 2%가 부족한 상태였다. 학위논문을 제출받는 당사자인 학교와 교수님들은 논문작성에 대해 그다지 친절하지 않은 정보를 제공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보의 완성도는 하락하고 있었다.

 

내가 학부과정을 마친 학교의 교육에 만족했고 이를 기준으로 삼아서 더욱이도 석사학위를 받은 학교에서 좌절감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좌절은, 내가 원하던 완성도를 달성해내지 못했던 졸업논문 작성 시기를 거치면서 더욱 고착화되어 갔고 지금까지 내가 느껴왔던 답답함과 갑갑함에 엄청난 기여를 하고 있다.

 

답답함을 타개할 방법이 무엇일까, 오래도 고민했다. 그 방법은 매일 논문 1편 씩 읽기이다. 논문작성법에 대해 체계적으로 배울 수 없다면, 여러 논문들을 읽고서 정리해보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를 매일 꾸준히 행하고 싶었지만 정작 현실은, 1) 아이패드를 가방에 넣으면 무거워져서 출퇴근길 지옥철에서 고생을 한다, 2) 회사가 바쁜 시기였던지라 근무 중 한 편의 논문을 제대로 읽을 시간을 낼 수 없었다, 3) 매일 논문을 읽다 보면, 내가 모르는 것이 이렇게 많았나 싶은 무력감에 휩싸일 것 같아서 그리고 얼마나 읽어야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한 막막함에 압도될까 봐 두려웠다는 이유들 속에서 회피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래서 입사 이래 읽은 논문의 수는 채 1편이 되지 않는다. 다시 이어서 읽고자 해도 집에서는 아이패드의 용도가 피곤에 찌든 몸으로 할 수 있는 최대의 행위인 유튜브와 OTT 서비스를 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기 때문에, 전혀 논문을 읽을 수 없었다. 역으로 말하자면, 퇴근 후 지친 몸을 눕혀 아이패드로 논문을 보고 있노라면 그것이 곧 딥슬립으로 빠지는 지름길이라는 것이다. 어쩌면 목표로 했던 논문 읽기를 달성해내지 못했기 때문에 최근의 감정이 답답함과 갑갑함으로 가득 찼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대학원이 제공해줄 수 있는 교육에는 분명 한계가 존재한다. 이를 입학 전에 미리 깨달았다면 분명 좌절의 크기는 작았을 것이다. 사회과학계열의 대학원에서의 과제라고 한다면 시험의 형식은 거의 찾아볼 수 없고 대부분이 소논문이므로, 이는 학생들에게 논문작성 연습을 시키기 위함은 분명한 사실이다. 모든 교수님들이 그 과제에 대한 피드백을 주시지 않으므로, 논문작성 스킬을 키우기 위해 교수님께 이메일을 드려 피드백을 받아보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 사람마다 개인차가 있을 수는 있으나, 대학원에 입학하기 전 그 학과에 대한 정보를 가능한 한 많이 수집하고 판단하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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