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 관련

불안에 떠는 대학원생, 바로 접니다 (feat. 석사생 본격 심야 다이어리)

knownlearn 2024. 4. 20. 14:04

 

지난 포스팅에서 석사과정 당시를 설명한 적이 있다. 오늘은 석사과정 중 작성한 일기를 공유해보고자 한다. 그 당시는 졸업을 앞둔 시기였기 때문에 더더욱 생각이 많았었다. 졸업 전에 취업이 정해졌다면 이 다이어리를 쓰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왜 호전적으로 무언가에 도전하지 않는 것인지 혹은 내가 능력이 부족해서인건지 수도 없이 고민을 했더랜다. 그 모든 생각과 일련의 사고들을 다이어리에 적어둔 것을 보면 말이다. 

 

하루의 생각을 적은 것이 아니라, 특히 졸업을 앞둔 시점에서 여러 날에 나누어 일기를 썼다. 

 

 

대학원의 존재 가치: 논문 쓰는 법을 알려주지 않는다?

 

대학원의 존재 가치: 논문 쓰는 법을 알려주지 않는다?

필자는 대학원에 들어가기 전에 그곳에서 배울 수 있는 것에 대해 설레곤 했었다. 마치 외교관 양성기관처럼, 마치 군사학교처럼 특정 직업이 노련하게 수행해야 하는 필수적인 스킬을 당연히

phdreality.tistory.com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생겨난 대학원생의 지적 열등감과 해결법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생겨난 대학원생의 지적 열등감과 해결법

개인적인 열등감 발현 모습에 대한 이전 포스팅을 읽었다면 익히 알 것이다. 필자가 다양한 측면에서 열등감으로 야기된 문제를 겪고 있었음을 말이다. 대학원생이었던 만큼 그중에서도 지적

phdreality.tistory.com

 

 

 

불안에 떠는 대학원생, 바로 접니다 (feat. 석사생 본격 심야 다이어리)
[이미지 출처: pixabay]

 

 

①  202X년 8월의 어느 날

불면과 미니멀리스트

 

 

지금 시각은 오전 2시 50분.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ost 수록곡 중 하나인 ‘어느 여름날(One Summer’s Day)을 한곡재생 설정하고 계속 들으면서 어두운 새벽을 무작정 만끽하고 있다. 분명 어제의 자정이 지나기 전에 졸음이 몰려와서 머리가 띵할 정도였는데 막상 침대에 눕고 유튜브를 보고 있자니 잠이 튕겨진 느낌이다. 몸은 여전히 졸리다. 방금 해버린 하품만 봐도 그렇다. 연속해서 해버린 하품은 늘상 그렇듯 이 시간의 내가 전혀 맑은 상태가 아닌, 잠과 싸우고 있는 졸음 가득한 상태라는 것을 증명한다.

 

졸음에 대해서는 알만치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몸은 잠에 들 수 없다. 왜냐고? 이미 수없이 반복된 일상의 이유를 찾는 행위에 큰 의미를 느끼지 못하겠지만서도 이유를 말해보자면, 나는 내일이 오는 게 무섭다. 머릿속에는 이미 생각이 너무나도 많아 도무지 글로 덜어내지 않고서는 잠을 이룰 수가 없을 것 같아서 아이패드와 매직 키보드를 세팅하고 책상 앞에 앉았다.

 

내일이 오는 것이 무섭다는 감정은 ‘살아서 무엇하나?’라는 근본적인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살아서 무엇하리, 어차피 죽게 될 것을.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기억이 확실치는 않지만) 아마도 몇 년 정도는 되지 않았을 성싶다. 나는 기억력이 좋지 않은 편이라 언제부터 회의감을 느껴왔는지는 나 스스로도 알 수가 없다. 어차피 죽을 건데 집을 마련해서 무얼 하며, 차를 사서 무얼 하며, 돈을 남겨서 무얼 하나 싶었고 머리로는 이 생각들이 결코 내가 살아있는 동안 도움이 되는 것들이 아님을 알고 있었지만, 부정하기가 어려웠다. 비싼 옷과 가방, 신발, 보석들은 살 가치가 없는 것들이었다.

 

어쩌면 내가 미니멀리스트가 되고자 했던 것들도 전부 인생의 회의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을까? 내가 가진 것들은, 내 소유였던 것들은 내가 죽고 나면 더 이상 내 것들이 아니게 된다. 사람은 어느 때에 분명히 죽는다. 나는 언젠가 죽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내가 언제 죽을 것인지 한 치 앞을 알 수 없다. 나를 더 괴롭게 했던 것은, 내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때에라도 나의 것을 정리해 두고 떠날 수 있도록 미니멀리스트가 되고자 했던 것 같다.

 

물론 미니멀리스트가 되고자 한 의식적인 배경에는 환경문제도 있었다. 하지만 의식보다 더 먼 나의 무의식 속에서는 분명히, 결단코 나의 죽음에 대한 대비책으로서의 역할을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용도별로 필요한 옷, 가방, 신발만 남기고 전부 중고로 팔거나 헌 옷수거함에 넣어버렸고 읽지 않는 책들은 기부했다. 대용량으로 쟁여두는 샴푸, 치약 등의 생필품이나 식품도 조금씩만 사서 먹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다. 나는 언제 죽어도 최소한만 남기고 떠날 수 있도록 매일매일 노력을 기울인다. 늘 생각해 왔던 것이긴 하지만, 내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사실은 생각할수록 슬프면서도 버겁다.

 

언제 죽을 것인지 안다면, 그때까지 하고자 하는 일을 계획해서 어떻게든 해내려고 할 텐데. 그렇지 않을까? 체력적으로 몸이 힘든 때를 제외하고는 정말 내가 죽기 전 날까지 최선을 다해서 살고 싶을 것이다. 지구가 멸망하기 전 날 무엇을 할 것인지 묻는다면, 그동안 경험해보지 못했던 것들을 어떻게 서든 몰아서 하고 싶을 테니까. 혹여 사고가 나서 다칠까 봐해보지 못했던 패러글라이딩, 바이크, 카레이싱 같은 레저 스포츠를 열심히 할 것 같은 나이다.

 

혹시나 내가 만약 죽음의 날을 알게 된다고 가정해 보자. 당장 가까운 시일 내나 몇 달 후처럼 가시감이 있는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에 내가 죽는다면, 당연히 나는 열심히 살려고 하겠지? 그런데 만약, 내가 죽는 날이 60년 후 혹은 100년 후처럼 너무나도 먼 미래의 시점에 내가 죽는걸 ‘확실히’ 안다면 나는 몇 십 년 동안 한결같이 꾸준히 성실히 일상을 보낼 수 있을까? 나 스스로는 당연히 "아니."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이유 1) 긍정 사고회로를 통해서 특정기간 이상이 넘어가면 시간이 충분하거나 많다고 인식할 것이다.

 

이유 2) 인간의 의지는 나약하기에, 성실히 살고자 하는 마음도 시간이 흐르면 흐트러지고 계획대로 실천하게 되지 못할 때가 올 것이다.

 

결국, ‘내가 몇십 년 후에 죽겠지?’라고 가정하고 사는 것과 몇십 년 후의 시점에 죽을 것이라고 확실히 아는 것과 질적으로 특별한 차이가 없다. 설사 죽음의 날을 모르더라도, 죽을 때 죽을 것이라 담담히 마음을 먹고 해야 할 일들을 해나가면 된다. 이러다가 갑자기 불의의 사고를 당하면 너무나도 당황스럽고 억울하고 아쉽겠지만, 사람의 운명이 그런 것을 어찌하리..

 

 

 

 

여전히 두려운 아침

 

 

다시 생각해 보니 어쩌면, 나는 죽음이 두려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직 가정을 꾸리지도 않았고, 사회에 제대로 자리 잡아 무언가를 해낸 것도 아니기에 한 인간으로서 누릴 만한 것들을 다하지 못해 아쉬움이 클 것이다. 그것을 알기에 더더욱 죽음이 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지금의 이 순간이 불안한 것일 수도. 그래, 이 순간들이 불안에 가득 차서 나는 매일 밤 쉽사리 잠에 들 수 없었던 것이지. 현재가 아니더라도 미래에 평생직장을 찾고 가정을 꾸리면, 그간 해온 것들이 아까워서 혹은 남겨질 가족들이 걱정돼서 다시금 죽음을 쉽게 생각할 수 없어 두려울 것이다. 결론적으로 죽음이 쉽게 다가올 때는 희박할 것이다.

 

글로 써내려 간 생각들 덕분에 나는 어느 정도 답을 찾은 것 같다.

인생은 알 수 없는 죽음의 때와 그로 인해 발생하는 불안을 죽는 순간까지 안고 가는 여정이다.

불안에 익숙해지거나 불안을 생각하지 않는 방도가 나에게 도움이 되겠다.

 

내가 내일이 부담이 되는 이유는, 공부하고 있는 논문을 볼 수 있는 여유가 많지 않아서 목요일인 내일까지 끝내야겠다고 다짐을 했기 때문이다. 이번주 금, 토, 일 모두 약속이 있어서 노는 동안에는 공부할 시간을 확보하지 못하니까 목요일이 마지노선이라고 생각했다. 핵심은, 목요일 안에 끝내지 못할 가능성이 높은 수준의 논문이라는 것이지. 그러니 부담이 안 될 수가 있나, 그렇지만 목요일 밖에 시간이 없는 것은 확실하다. 딜레마가 불면을 초래했다. 인생이고 죽음이고 나발이고. 그것들과 불안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해야 할 일 한 가지가 나를 이렇게 만들다니.

 

오늘의 진짜 결론은 이것이다. 미루지 말고, 틈틈이 할 일을 해 두자. 나 같은 사람에게 일이나 공부를 미루는 것은 인생의 짐을 몇 배로 얻는 것과 같다. 아침에 일어나서 최대한 논문을 보고, 하기 싫어도 회피는 인생의 짐이 될 것을 머리와 가슴으로 깨닫고 마주하려고 노력하자. 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 새벽 2시 50분에 아이패드를 켜고 4시가 넘어가는 시간까지 머리를 굴렸다. 어두운 밤 속에서 누런 조명등 두 개를 켜고 키보드 자판을 두드리는 꼴이라니. 나는 이러려고 잠을 자지 못한 것인가 보다.

 

 

 

 

② 202X년 8월의 또 다른 날

 

깊이 잠을 잘 수 없다

 

 

지금 시각은 자정을 넘기고 22분도 더 넘겨버린 때. 역시나 잠을 자기가 어렵다.

 

졸업을 앞두고 결정되지 않은 미래에서 다가오는 불편한 감정이 가증되고 있었던 참이었고 그로 인해 더욱 잠들기가 어려웠다. 어제와 그저께는 이미 잠을 제대로 그리고 충분히 자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오늘은 몸 상태가 계속 좋지 않았다. 텐션이 잘 오르지 않고 목소리도 몸짓도 가라앉았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패드와 매직 키보드를 세팅하고 침대 위에 엎드려 자리를 잡았다. 생각을 글로 덜어내지 않으면 그러지 않은 상태보다 더 머리가 지끈거리고 아플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이미 사나흘이 넘는 기간이 지나는 동안 수면의 질이 하락하고 있었기에 수면부족으로 인한 두통이 시작되었다. 머리가 아파도 잠들지 못하는 것은 정신의 문제임이 명백하므로 글을 적어내어야 한다는 것도 명백했다.

 

내가 쉽게 잠들지 못하는 이유는 많다. 졸업논문을 작성할 때였던 바로 한 달 전만 하더라도 논문에 대한 걱정과 교수님들의 평가가 부담이 되어서 잠을 자지 못했고, 논문을 끝낸 지금에는 졸업 이후의 여정이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 불면의 뿌리가 있었다. 지금 원하는 취직이 해결되면, 잠이 잘 올까? 나는, 석사 졸업 이후에 취직 문제가 해결되거나 박사를 지원하고 입학이 확정되어 다음의 여정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을 상황이었더라도 불면을 맞이했을지도 모르겠다. 박사를 입학하고 나서, 취직을 하고 나서의 걱정을 사서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취직이 걱정된다고, 돈이 문제라고 나를 잠에 들지 못하게 하는 스스로를 보면 결말은 두고도 뻔한 비디오일 뿐이다.

 

결국 어떤 상황에 놓여 있든지 간에 불안하느냐, 불안하지 않느냐의 차이는 생각이 만드는 것뿐이다. 나는 이 사실을 그 누구보다 머리로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실천으로 옮기지 못하는 이유는, 역시나 마음 한 켠에 내재하고 있는 나와 오랜 시간 함께 해 온 불안이라는 존재다.

 

 

 

 

불안

 

 

불안감은 말이다. 100%로 떨쳐낼 수 있을까 싶은 존재다. 그런데 언젠가 한 번쯤은 불안을 온전히 떨쳐내는 순간을 맞이하고 싶다. 그간 내 삶에 들어와서 많은 것들을 제약하고 나를 괴롭힌 존재이기 때문에 버려 버리고 싶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지금의 소망과는 다르게 불안을 쉽게 이겨낼 수 없다고 생각한 이유는, 불안을 온전히 버려내면 내가 오만하고 자만하는 인간이 되어버릴 것 같은 불안 때문이다. 지금은 불안의 늪에 빠져버려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상황이다. 나 스스로가 답답하고 한심스럽다. 나는 왜 불안이 많은 사람이 되었을까? 이에 대해서는 추후 자세히 적어보도록 하겠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불안하지 않게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것에 대한 답을 내리는 것이다. 마음 편히 자고 싶다. 그런데 불을 끄고 누우면 여러 생각이 떠오르고, 몸을 지치게 하기 위해서 잠을 적게 자고 운동을 하고 누워도 잠이 오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과거에도 그랬기 때문에 지금 이런다고 놀라운 것도 아니다 만은. 내가 지금 가장 두려워하는 미래는 내가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지 않고 지내면, 당장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라고 생각하며 애매하게 살아가는 모습이다. 이러한 미래가 가능한 이유는 지금의 나 자신이 ‘나의 페이스대로 살아간다’라는 모토 하에 남들과는 느린 속도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느리다고 해서 엄청 느린 건 아니고, 그저 과거에 그랬듯 치열하고 열정적이고 빠르게 나아가지는 않을 뿐이다. 여기에는 불안감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불안감이 없는 상태이다. 모순이지만, 정말 그렇다. 돈에 대한 걱정이 일절 없는 백만장자였다면, 내가 이런 불안에 휩싸이고 있었을까? 다른 류의 고민과 불안을 하고 있었을까? 아니면 아예 불안해하지 않았을까? 도대체 나의 불안은 어디에서 시작되었고, 어떻게 끊어낼 수 있을까? 나 같은 성격은 프리랜서로 사는 게 가능할까, 이렇게 어느 곳에도 소속되지 못한 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때에 불안감을 격하게 느끼는데… 남들 일할 때 여유로운 프리랜서로 살고 싶은데 말이지.

 

돈에 대한 걱정이 일절 없는 백만장자였다면, 내가 이런 불안에 휩싸이고 있었을까? 다른 류의 고민과 불안을 하고 있었을까? 아니면 아예 불안해하지 않았을까? 도대체 나의 불안은 어디에서 시작되었고, 어떻게 끊어낼 수 있을까? 나 같은 성격은 프리랜서로 사는 게 가능할까, 이렇게 어느 곳에도 소속되지 못한 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때에 불안감을 격하게 느끼는데… 남들 일할 때 여유로운 프리랜서로 살고 싶은데 말이지.

 

마음을 편히 먹어보자고 다짐한다.
아직 나는 이룬 게 많이 없는
평범한 하나의 인간이지만,
미래에는 이룰 무언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

이루지 못해도 괜찮아.
행복한 사람으로 사는 것도
성공한 삶이다. 

 

 

내가 가진 욕심은 적어도 지금 몸담은 분야에서 인정받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인간으로 살아가면서, 본인의 분야에서 열심히 성과를 내는 것이 이타적이고도 시간을 헛되게 쓰지 않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아마도 이런 내 욕심 때문에 석사 졸업 후 괜찮은 연구기관에 들어가서 열심히 연구하면서 살아가고 싶은 것임을 알고 있다. 그리고 내 생각대로 풀리지 않기 때문에 더욱 괴롭고 불안한 것이겠지.

 

'욕심'이라고는 표현하기는 했지만, 내 개인적인 인정욕구 외에도 내가 연구하는 분야가 타인을 위해 도움이 될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내 욕심 자체가 정직하게 욕심이 아니기도 하다. 나만을 위한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더 애가 타는 것일까. 싫은 감정을 즐겨봐? 어떻게 하면 즐길 수 있으려나?

 

삶의 모든 과정을 불안하지 않게 즐기고 싶다. 심각하지 않은 듯 실소를 머금고서 쿨하게, 멋있게 그리고 여유롭게. 통달한 듯이 천천히 여유롭게, 그러나 뒤쳐지지는 않은. 나 스스로에게 괜찮다 말하고 불안을 탁 내려놓아 보자. 내려놓는다고 사라지는 것 또한 불안일 테니. 불안이 어디에든 존재한다면, 어디에든 존재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불안하지 않아도 돼. 
주변 사람들이 말하는 것들은
그들의 생각일 뿐. 

나의 생각도 결심도 아니니까. 
휘둘리지 말고. 
내가 나에게 확신을 가지고
말하고 행할 수 있는 것들만을 생각해. 

내 인생은 내가 살아가므로
내 목소리를 듣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