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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생겨난 대학원생의 지적 열등감과 해결법

knownlearn 2024. 4. 20. 07:20

개인적인 열등감 발현 모습에 대한 이전 포스팅을 읽었다면 익히 알 것이다. 필자가 다양한 측면에서 열등감으로 야기된 문제를 겪고 있었음을 말이다. 대학원생이었던 만큼 그중에서도 지적 열등감이 가장 컸다고 생각되므로 오늘 포스팅에서는 지적 열등감이 생겨난 원인을 분석해 보고 그 해결법에 대한 생각을 나누어 보려고 한다.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생겨난 지적 열등감과 해결법
[이미지 출처: pixabay]

 

 

 

1. 시작은 '셜록 홈즈'

 

내가 세상의 다양한 측면들에 대해 탐구하고, 배우고, 더 알고자 하지 않음에 대한 후회를 하기 시작한 것은, 아무래도 아서 코난 도일의 명작인 셜록 홈스 시리즈를 접하게 된 중학교 때부터였을 것이다. 중학교 이전의 때에도 알지 못함에 대한 한탄스러움을 가졌을 수도 있지만, 초등학교 때의 기억이 잔존하기에는 그다지 적지 않은 나이라 그 당시에 대해 확실히 말할 수가 없다. 다만, 중학교 시절을 아우르며 '셜록 홈스'라는 비현실과 현실을 넘나드는 캐릭터를 알게 된 후로는 분명하게 '내가 모르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을 가지기 시작했다.

 

셜록 홈스는 보통의 연구자나 학자, 전문가를 넘나드는 수준의 지식을 가졌다. 그가 소설 속에서 통달하고 있던 지식 분야도 범죄학에 국한되지 않았고 군사학, 지질학, 생리학, 화학 등 다방면에 이르렀다. 한 개인이 하나의 분야에 통달하기도 어려운데 셜록은 어떻게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보이는 것)일까? 셜록이 아무리 부양해야 할 가족과 함께 살지 않고, 만나는 친구들도 거의 없고 대부분의 일상을 지식 탐구에 힘써왔다고 한들, 노인의 나이도 아닌데 나름 창창한 나이에 저 정도의 지식을 머릿속에 집어넣을 수 있는가란 의구심도 가졌다.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생각이 든다면, 나도 할 수 있다고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셜록을 처음 만난 중학생이었던 나는, 소설은 소설일 것이며, 내가 어리기도 하지만 특정 분야에 쏟을 열정조차 없기 때문에 셜록이 될 수 없다고 단정 지어 왔다. 아마 단언컨대, 무의식 속의 나는 그처럼 되고 싶어도 될 수 없다고 생각을 해왔을 것이다.

 

중학교 시절부터 ① 어리니까 역량이 부족해서, ② 관심과 열정이 없기 때문이란 핑계로 나 자신을 둘러싸고 지금에 도달했다. 지식 탐구에 대한 이런저런 핑계를 가졌다고 해서 내 학창 시절이 공부를 안 했다거나 못했다거나 한 과거로 점철된 것은 아니다. 초등학생 때는 경쟁심과 질투라는 어린 마음에 내가 늘 최고여야 한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공부를 했고 어렵지 않았기 때문에 잘하기도 했다. 중학생 때부터는 2번의 이유가 점층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좋아하니까 공부한 과목들만 100점을 맞아오기 일쑤였고 공부하지 않은 과목들은 만점을 받지 못한다고 한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고등학생 때는 ②번의 핑계가 활화산처럼 폭발했을 때다. 중학교 때 싫어하는 과목을 제대로 심도 있게 공부하지 않았으니, 좋아하는 과목과 싫어하는 과목의 격차가 더 벌어졌다. 악순환의 굴레처럼 싫어하는 과목의 성적이 안 나오게 되니 노력하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고등학교 과정은 기초적인 지식도 중요하지만, 심화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각각의 논리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한데 나에게는 그를 위한 훈련이 전혀 되어 있지 않았기도 했다. 고1 때의 담임 선생님이 반 1등으로 입학한 나를 본인의 명예를 위한 수단으로만 보는 것 같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게 된 후로는 그녀를 위해 공부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내가 하고 싶은 공부만 했다. 한국의 교육 시스템에도 불만이 적잖이 있었던 터라 입시 공부 자체에 회의감을 가졌었다.

 

한국의 입시제도는 그 당시 나에게 '틀림' 그 자체였다. 도무지 맞추어 줄래야 맞추어 줄 수가 없겠는 비효율적인 존재였다. 설사 내가 좋은 성적으로 국내 대학에 입학한다고 한들, 즐길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런 와중에 다행이었던 것은, 초중고 교육과정에서는 내가 배우기 싫은 이과계열 과목을 배워야 하지만 대학부터는 원하는 전공을 내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다는 자유로움, 그것 단 하나였다. 그런 내가 어찌어찌 원하는 전공으로 대학교에 진학했다.

 

 

 

 

 

2. 대학교에 입학한 이래로

 

입학 첫날의 오리엔테이션. 배우고 싶었던 학문을 마주했다. 나는 고등학교 때 배워본 적 없는 사회과학계열의 전공을 택했다. 그 말은 즉슨, 중고등학교 때에 자주 접하지 못한 개념을 차차 배워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확실히 내가 배우고 싶은 학문이었다 보니 그 어느 때보다 지적 흥미는 최고조에 이르렀다. 그러나 오래간만에 절정에 이른 흥미는 얼마 가지 못해 바닥을 치게 되는데 이는 단순히 높은 성적을 얻느냐와 더 깊은 지적 심연에 들어가느냐 사이의 딜레마로 설명할 수 있다.

 

내가 가지고 있던 흥미만을 활용한다면 높은 성적을 달성하는 것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정말 문제라고 말할 수 있었던 문제는 '어디까지 공부해야 하는가?'에 대해 스스로 결정할 수 없었던 나의 상태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러한 내 문제적인 고민을 왜 친구나, 교수님과 상의해보지 않았을까란 아쉬움은 남는다. 당시에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던 이유는 원하는 성적을 얻어내는 게 많이 어렵지 않았기에 지금처럼 크게 체감하지 못했던 고민이기도 했고, 교수님이란 존재는 진지한 결정이 필요한 사안을 나눌 때에 찾아뵈었기에 먼저 고려하지 않았던 탓이다.

 

그렇지만, 그 당시를 돌이켜보는 지금에서 확실히 알 수 있다. 과거에는 작았던 문제가 현재에서 보다 더 크게 발현되었다면, 분명 과거 시점부터 중대한 문제였을 것이다. 학부 시절에 높은 성적으로 졸업했다는 사실은 나를 이 문제로부터 멀어지게 했다. 멀어져도 괜찮지 않을까란 합리화로 자연스레 이어졌고, '어디까지 공부해야 하는가?'란 질문에 대한 답을 내리지 못한 채 몇 년이 흘렀다.

 

그런 상태로 석사과정에 진학했으니 나의 대학원 생활은 그저 '우당탕탕 좌충우돌'이었다. 영어로 진행되는 수업이 있는 날에는 영어도 제대로 못하는 토종 한국인이 무슨 패기로 이 수업을 듣겠다 했는지 자책하고, 그 수업에서 서술형 시험을 준비해야 할 때는 예시 답안을 만들어 무식하게 모두 외워갔다. 언어의 한계로 내 머릿속에서 충분히 소화시키지 못하는 과목을 듣기를 수 차례. 결국 학부시절 관련 과목을 착실히 학습하고, 자기주장을 자신감 있게 꾸려 나가고, 어릴 적 유학생활 등으로 여러 언어가 원어민 수준으로 가능했던 여러 동기들과 나 자신을 비교하기에 이르러 교내 상담소에 방문해야만 했던 암흑의 시기를 경험한다.

 

지적 흥미의 범주를 넓혀가자던 의지는 더욱 작아지고, 내 관심 분야마저도 웬만한 동기부여가 아니고서야 순수하게 즐거운 마음으로 대하기가 어려워졌다. 나는 앞으로 이 마음을 가지고 박사과정에 충실히 임할 수 없을 것 같기도 하다.

 

 

 

 

 

3. 무지에 대한 크나큰 후회

 

왜? 나는 왜 지레 겁먹고 지적 탐구의 세계로 더 나아가지 않았을까? 먼저, 나는 '어디까지 공부해야 하는가?(=무엇을 공부해야 하는가?)'에 대해 답을 찾아내지 못했다. 즉 학습의 명확한 기준을 설정해두지 않았기 때문에 수강했던 학과 수업들에서만 요구되는 수준에 머물렀던 것이다.

 

아무리 학과 수업들에서 핵심적인 지식들을 배웠다고는 하나,

1) 모든 수업 내용들이 장기적으로 기억되지 않았고,

2) 배움의 행위가 곧 내가 이해하고 알고 있다는 것과 동일시될 수 없으며,

3) 특정 분야를 다루는 한 수업이 착실하게 과거와 현재의 학문적 배경, 경향, 주장 등을 반영하고 있다고 가정할 수 없으며,

4) 학사일정, 교수자 및 개인 사정으로 매 수업을 참가하지 못한 등의 변수를 고려한다면, 학과 수업을 통해 배울 수 있는 지식을 온전히 소화하지 못했다고 말해야 현실적일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통상적으로 진행되는 학부 및 석사과정의 학과 수업에서 요구되는 지식들도 제대로 습득하지 못했다. 수업 외에 참여했던 연구 프로젝트나 학술논문 등을 다루며 추가적으로 습득한 지식 또한 그 범주가 넓지 않았으며 기억의 휘발성을 감안한다면 나의 것으로 남아있지는 않다. 이게 바로 박사과정으로 진학할 수 없는 이유인 나의 현 상태이다.

 

추측하건대 내가 무엇을 (더) 공부해야 하는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보지 않은 이유는 '회피'와 '과도한 걱정'에 근거하고 있을 것 같다. 만약 내가 더 공부를 해야 하는데 그 과정이 지루하고 늘어진다면, 학문적인 흥미를 잃을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당시의 나는 갓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로망에 가득 찬 캠퍼스 라이프를 꿈꾸던 대학생이었으니 적정 시간을 노는 데에 쓰고 싶은 마음이 컸다. 내가 노는 것을 포기하고 공부를 더 해야 한다면 고시생에 준하는 정도로 파고들 것이 뻔했고, 이를 알고 있는 스스로로서 학문적인 흥미를 잃을 것이 두려워서 그리고 캠퍼스 라이프를 더 즐기고 지냈으면 해서 무의식적으로 더 공부하지 말라고 지령을 내렸을 수도 있다. 언어적 한계를 핑계로 두기에 유용하기도 했다.

 

여기에는 외곬수이자 완변주의자인 나의 성향 탓이 크다. 어릴 때부터 좋아하는 것만 공부했고, 멀티태스킹이 잘 되지 않았다. 무언가 하나에 집중하면 그것을 먼저 끝내거나 만족할만한 수준에 도달해야 미련이 남지 않았다. 지독한 완벽주의는 아니었는데 그냥 하나의 일에 몰입하고 있는 상태가 좋았고, 살아있는 이유로 와닿았다. 그러다 보니 과정 중 지쳐 늘어져도 내가 정한 목표에 다다를 때까지 다른 일들을 하지 않았으므로 결과론적으로는 많은 것을 해내지 못하게 된 것이다.

 

 

 

과거로 회귀하지 않는 법

 

지금에서야 과거의 나에 대한 문제제기를 한 것은, 앞으로 그렇게 살면 안 된다라는 생각 때문이다. 현재까지 내가 얻은 것이 많이 없으니 미래에 무언가를 하고자 한다면, 과거와 같은 마음가짐과 태도로는 역부족일 테니까. 이렇게 살면 안 된다는 시작점에서의 의지를 다잡았다. 그다음에는 박사과정 진학을 위해 무엇을 공부해야 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해 보아야 할터이다.

 

더불어 공부를 위한 새로운 일상 루틴을 추가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한 지인 분께서 양치하는 시간에도 가볍게 읽기 좋은 책이 있으시다며 추천을 해주셨는데 두꺼운 전공서적은 아니었으나 그 내용이 인문학 전반을 아우르는 꽤 심도 있는 책이라서 속으로 반성 아닌 반성을 했다. 나는 양치할 때, 핸드폰을 보거나 아이패드로 영화, 드라마를 본다. 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제대로 고시생에 준하는 듯한 루틴으로 지내본 적이 시험기간을 제외하고는 없다. 일상 속에서 내가 배우고자 하는 지식을 격렬히, 열정적으로, 온 마음으로 쟁취하기 위해 노력해 본 적이 없다.

 

과거와는 다른 삶을 위해 나 스스로 지켜야 할 계획은 다음과 같다.

간단하게, 인풋의 양을 대폭 늘리자는 것이다.

 

물론 회사에서 바쁜 시기가 있으므로, 업무에 치인다면 리딩을 위한 시간을 확보하지 못할 수도 있고, 시간이 확보되었더라도 너무 피곤하여 리딩을 할 의지가 생성되지 않을 수 있다. 그래도 이렇게 하루를 보내지 않으면, 나는 매일이 생산적이지 못한 채 실질적으로 돈을 벌고 있더라도 '미래(에 될 수도 있는) 백수'의 삶을 사는 사는 것과 진배없다. 그러니 뭐라도 해야 한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지적 열등감을 이겨 낼 자그마한 변화조차 없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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